*****부석면 연혁****

[감곡리]   [남대리]   [노곡리]   [보계리]   [북지리] [상석리]   [소천리]   

[용암리]   [우곡리]   [임곡리]

[부석면 지도] [부석 오시는 길] [열차 및 버스 시간표]

부석입구인 소방대에서 내려다본 부석시가지

 본 면은 본래 순흥부의 2부석면.3부석면.도강면의 지역으로서 조선조 세조 3년에 순흥부가 폐부될 때 영천군으로 이속되었다가 조선조 숙종때 순흥부 부설로 환속하였으며 2부석면은 감곡.성남.감산.고산.감산.구석.화부.용암의 7개리, 3부석면음 임곡.대율곡.방동.독유동.사문단.호문단.마흘.의풍의 8개리, 도강면은 우수.석탄.각암.보계곡.문좌곡.모의방.영모암.도봉의 8개리를 관할하였다.
  그 후 2부석면은 용암면으로 3부석면은 봉양면으로 고쳤으며 용암면은 본리.교천.우곡.고산.감곡.석남.소천의 7개리, 봉양면은 마흘천.남대.신기.송구.북지.대율.상임곡.봉래동.상사문.하임곡.답곡의 12개리, 도강면은 모치.보계.재암.도복.영모.상석.우곡의 7개리로 관할하였으며 1914년 군면 폐합에 따라 부석사가 있는 부석의 이름을 따라서 부석면이라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80년 4월 1일 법률 제 3188호로 영풍군 부석면이 되었다. 1979년 소도읍 가꾸기로 시가지의 도로가 포장되었고 1980년에 부석사행 도로를 10m 노폭으로 확장하여 관광지의 참 모습을 가꾸어 가고 있다.
  주요 농작물로는 콩.수박.배추.고추 등을 들 수 있는데 특히 사과는 풍기읍 다음 가는 생산량을 보이고 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약용 작물로 지황.목단.백작양 등을 재배하고 있다. 명승고적으로는 신라 문무와 16년에 의상조사가 창건한 부석사가 있으며 경내의 무량수전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유명하다. 국보로 석등. 무량수전.조사당.소조여래좌상.조사당벽화등이 있고 또한 경내에는 수 많은 문화재가 있어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다.

 

****감 곡 리****     black07_up.gif[위로]
  옛날 이 마을 앞에는 감호라 불리우는 못이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풍년 농사를 기원하는 뜻에서 못에 물이 가득 차기를 빌었으며 그 때마다 못물이 가득차서 해마다 풍작을 이룩하였고 그로하여 훗날 감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도봉.도북. 도부랑 마을 양편에 산봉오리가 여러 곳에 늘어서 있고 그 가운데로 길이 있는 마을이라하여 도봉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또 국모봉으로 가는 길이라하여 도봉이라고도 한다. 조선조 초기 송함이란 찰방이 이 곳을 개척하여 도부랑이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조선조 마엽에 와서 도봉이라 개칭하였다고 한다.
  석남, 성남 마을의 남쪽에 큰 바위가 공중에 뜬 듯 솟아 있어 이를 공중바위라고 하며 이 바위가 남쪽을 바라보고 있다하여 석남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안산마을 석남 마을 맞은 편에 위치한 산세가 마치 두 팔로서 둥글 게 포근히 이 마을 안은 모양을하여 있기에 안산마을이라 부른다 한다.
  영모암 마을 뒷산에 큰 암자가 있었는데 그 암자의 그림자가 바위같다 해서 영모암이라 하였으며 또 조상드을 그리는 뜻에서 영모암이라고 불리어지게 되었다 한다.
  선 바우. 입암 마을 앞 입구에 마을나무인 느티나무 옆에 크고 높은 바위가 충암절벽을 이루고 있으며 흡사 깍아 세운 듯한 바위가 있는 데서 연유하여 입암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둔전마 도부랑 동쪽에 위치한 옛날 화전민들이 몇집 모여서 화전을 일구어 살던 마을로 지금은 사방으로 흩어져 버리고 폐동이 되었다.
  범바위마을 영모암 북쪽에 위치한 마을로서 이 마을에 커다란 바위가 자리잡고 있는데 그 바위의 형상이 흡사 범을 닮았다고 해서 범바위라고 부르게 되었다.

 

****남 대 리****   black07_up.gif[위로]
  텃골.기곡 남대 남서쪽에 있는 마을이며 화전민들이 이룩한 마을이다.
  남대리.남대.남대궐으로 귀양 온 금성대군이 단종복위를 위해 이곳에서 자주 밀사를 모의하였으나 실패하자 그를 애석하게 여긴 백성들이 이곳에 정자를 짓고 남대궐이라는 현판을 붙인 것에 연유한 것이다.
  짐또배기.마지천리.마흘천.남대리 서쪽에 있는 마을이며 가장 번성기에는 36가구였으나 현재는 17가구 뿐이다. 각 성으로 이루어진 마을로 약초를 재배하여 생계를 이어 가고 있다.
  샛터.상신기 남대궐 남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단종대왕을 흠모하는 백성들로 생긴 화전민 촌이다. 가장 번성기는 32가구였으나 소개령으로 철거 또는 이주로 인하여 현재는 5가구 뿐이다.
  소란.송내 남대궐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낙락장송에 둘러싸인 작은 마을이며 가장 번성기는 34가구였으나 현재는 12가구이다. 농업의 약초 재배를 주업으로 하는 마을이다.
  중마.중리 소란 북서쪽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가장 번성기는 16가구였으나 거의 이곳을 떠났고 몇 집이 화전을 일구어 생활하고 있다.

 

****노 곡 리****    black07_up.gif[위로]
  남자일.남절.윗호크랭이.호문.남사동.남좌동 용수산의 남쪽 가운데 마을터가 제일 좋다고하여 남제일이라 불렀으며 지금은 음이 와전되어 남절이라 부르고 있다.
  은행정 노곡1리에 속한 자연 부락으로서 마을 부근에 잡목이 우거져 있고 마을 어귀에는 큰 은행 나무가 있었는데 동민들이 은행나무를 신성시하여 잘보호하고 다른 나무는 벌목을 하고 집을 지으면서 마을을 형성하였다. 그뒤 은행나무 밑에다 정자를 짓고 마을의 길복을 빌며 살아 왔다하여 은행정이라 불려졌다.
  망골.두곡.두릉.두신 용수산 봉우리에서 뻗은 산줄기가 마을 전체를 막고 있어서 막은 골이라 불렀다. 지금은 와전되어 망골로 부르고 있다. 망골.은행정.새터를 합하여 두신 농촌진흥조합을 만들었으며 두곡의 두자와 신기의 신자를 따서 두신이라고도 부른다.
  양지마.양중동 소백산맥의 자개봉에서 이어진 용수산 중턱에 자리잡은 양지바른 곳이므로 양지마을이라 불렀다. 일제 때에 양지마을.중마을 낙절을 양중농촌진흥조합을 만들었던 까닭에 양중동이라고도 불렀다. 마을에서 쑥 들어간 곳에 등심이라는 골짝이 있는데 조선조 말엽에 72명의 은사가 속세를 피하여 이곳에 은기하였다하여 어귀를 두문동천이라고도 부른다.
  중마.노실.노곡.중리.답곡 여러 마을의 한가운데에 위치하여 중마라고 불렀다. 노실이란 명칭은 옛날에백로가 많이 살았고 백로 집이 많았던데에서 유래한 것이며 또 논이 많은 골짜기라고 답곡이라 한다고도 했다.
  새터.신기. 노곡1리에 속한 자연 부락으로서 망골 마을에 살던 사람들이 점차 가구수가 불어나서 망골에는 집을 더 지을 터가 없기에 새로운 마을터로 잡은 곳이며 새로 마을터를 개척하여 삵았다고 하여 새터라 불리어졌다.

 

****보 계 리****     black07_up.gif[위로]
  보계.보교 마을의 골이 깊이 수원이 좋으며 가뭄에도 개울의 물이 마르지 않아 농사에 흉풍이 없는 곳이며 이 작은 개울이 보배스럽다고 해서 보계라 칭하였다는 설도 있고 또 산이 사방으로 둘러 싸여 마치 가마처럼 되어 있다고 해서 보계라고도 전해 오고 있다.
  보계실.원보계 보계는 원래 보계암이 있어서 연유된 것이라고도 하며 보계란 극락정토즉 고뇌가 없는 곳을 일컬으며 마을 깊숙히 산 속에 방같이 둘러 싸여 있어 이곳을 보계방이라 한다. 옛날에는 실자(實字)가 든 곳은 피난실이라 한다. 옛날에는 실자(室字)가 든 곳은 피난처로 알맞았으며 지금도 이곳을 원보계라 부르고도 있다.
  광챙이.광릉동천.광릉.광창  원래 이곳을 광창으로 불러 왔으며 세월이 흐름에 따라 부르기 쉽고 소리 나는 대로 광창이로 불렀으며 다시 광챙이로 불리고 있다. 사람에 따라 광릉동천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불바우.뿔바위.각암   마을 입구에 뿔같이 생긴 바위가 있어 이런 연유로 뿔바위.각암이라 칭하였다. 어원이 차츰 변하여 부르기 쉽게 뿔리 불로 바위가 바우로 불러어져 불바우라 한다. 그러다가 뿔이란 말이 좋지 않다하여 쌍구슬 각를 써서 각암이라고도 쓴다.
  상모치.점마.모치방.모치  모치래기(메추라기)라는 새가 이곳에 있었는데 마을의 산이 모치래기 새와 같이 생겼다고 해서 모치라 칭하였다 한다. 자연 부락이 산재되어 있고 위쪽을 상모치. 가운데를 중모치. 아래쪽을 하모치라 부르고 있다.
  호바우.오룡동  60여 년 전에는 이곳을 호바우라고 칭하였다 하며 그후 송원식이라는 사람이와서 앞산의 봉우리가 용같이 생긴 다섯 봉우리가 있다고 해서 오룡동이라고 명명하여 지금까지 전해 오고 있다.
  응징이.응정  마을 앞 산의 모양이 매의 부리와 같은 형상을 하고 있어 사람들은 응정이라고 불렀으며 그 후 점차로 발음이 와전되어 지금은 응징이라고 부르고 있다.
  문좌실   불바우 마을에서 북서 간 약 1km지점에 위치한 곳으로 창원 황씨들의 제실이 단 한 집 있을 뿐이며 주위에는 황씨 선대의 묘지가 산재하고 있다.
  제궁골.제궁마.제궁마을.제궁촌  황창남쪽에 위치한 마을인데 이 곳에 선성 김씨 들의 제궁이 마련되어있으므로 이에 연유하여 제궁마 또는 제궁촌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하모치  상모치 아래쪽에 있는 마을로서 이곳에 상모치.중모치.하모치의 세 개 자연 부락이 타원형으로 멀지 않은 거리를 두고 산재되어 있다.

 

****북 지 리****     black07_up.gif[위로]
  갓띠.북지리.관대  마을의 뒷산이 갓 모양이며 그 기슭에 마을이 띠 모양으로 자리잡고 있으므로 갓띄라고 부르게 되었다. 본래는 순흥군 봉양면 이었으나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영주군 부석면에 편입되었다. 조선조 중종이후 청주 정씨가 군거하였으나 지금은 몇가구만 살고 있다.
  송두들.속두들.송고  소백 소맥에서 흐르는 계곡의 맑은 물이 동리 중심을 뚫고 흐르고 있으며 **이 좋을 뿐 아니라 부석사와 지경한 마을로서 사찰 외곽을 둘러싼 송림이 마을 뒤에 우거져 언덕을 이루었기에 송두들이라 부르게 되었다.
  방골.방동  부석사 동쪽에 위치한 인접 촌락으로 부석사 전성기에는 승방이 있는 동리 즉 방동이 와전되어 방동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지금은 30여 가구가 취락을 이루고 있다.
  허뭇거리.허문거리  신기 부석사 입구에 자리잡은 산촌이며 봉화 물야 방면으로 가는 노변에 위치한 관계로 행인들의 약탈 등 행패가 심하여 마을을 유지하기가 어렵게 되자 마을 입구의 골목을 없애고 문을 폐쇄해 버렸으며 이런 연유로 허뭇거리라 일컫게 되었다. 지금의 마을은 그 뒤 질서가 잡히자 위치를 옮겨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여 신기라고 했다.

 

****상 석 리****    black07_up.gif[위로]
  수사  상석리를 북으로 남으로 가로 질러 흐르는 내가 있는데 그 중에서 이 마을 앞 내가 다른 곳보다 물이 많이 흐르고 모래가 많이 쌓였다하여 옛날부터 수사라고 부르게 되었다.
  도탄.석탄  옛날에는 이 마을 앞에는 돌여울이 흐르고 있어 석탄이라 불리어 왔다. 조선시대 순흥부에 속해 있을 때 석탄은 도강면 감산 봉양면에 소속되었고 또 이곳에 도강서당이 있었는데 복숭아 나무가 많았다는 데 연유되어 도탄이라 불리게 되었다고도 한다.
  솔안.송내  이 마을 주위에는 수백 년이나 되는 노송들이 송림을 이루고 있었는데 이 노송들이 마을을 에워싸고 있었으므로 송림 속의 마을이라고 하여 솔안 또는 송내라고 불렀다 한다.
  감살미.감산  이 마을 둘레의 산세가 아름다울 뿐 아니라 옛날에는 이 곳에 감나무가 많이 있는 산밑이라는 데 연유하여 감산이라 하였다. 지금은 부르기 쉽게 소리나는 그대로 감살미로 부르고 있다.
  들마.평촌들.평촌   들이 넓고 들 가운데에 작은 마을이 있었다고 해서 들마을이라고 불렀다. 170년 전에 들 옆의 산 기슭으로 마을을 옮겨서 평촌이라 부른다.
  고산  마을 뒤에 우뚝 솟은 외로운 산이라서 고산이라 하였으며 조선시대 순흥부 당시 고산리로 불러 왔으며 또한 산세가 높다고 해서 고산으로도 부르고 있다.

 

****소 천 리****    black07_up.gif[위로]
  남산  면소재지 남동쪽에 위치한 **으로 형성된 마을이다. 노송이 울창한  풍치림을 이루고 있으며 구릉 남동쪽에 인가가 30여 가구 모여 있고 경치가 빼어 난 마을이다.
  달터.월대  소천5리에 속한 자연 부락 중 가장 작은 마을로서 마을을 둘러싼 산세가 아름다운 반월형국이며 다래 덩굴이 우거진 밑에 몇 가구가 집을 지어 살았는데 다래 덩굴 밑에서 달이 뜨는 것을 보면 달이 띠를 두른 득하다 하여 월대라 하였으며 그 뒤 우리말로 달터라 불려졌다.
  두들마  마을의 생긴 모양이 뱃머리 형상이며 언덕 위의 마을이라는 데서 두들마라고 불렀다. 지금도 이 마을에는 물이 나지 않아 마을 동쪽의 내 건너에 있는 우물물을 식수로 이용하고 있다. 마을 어귀에 서있는 두 그루의 느티나무는 옛날 정옥 황해도 감사가 태어났을 때 심었다고 하며 수령이 약 280여 년이 된다고 하며 지금도 건재하고 있다.
  물구지.물거지.수양동   양지바르고 따뜻한 마을이며 물이 맑고 호수처럼 생겼다고 하여 물구지라 불렀다.마을 앞에 성황당이 있고 동민의 길복을 기원하고 풍년을 빌기 위하여 지금도 음력 정월 보름날에 고사를 지낸다고 한다.
  봉래골.도래동.봉래  옛날에 양 봉래라는 사람이 태어난 마을이라 하여 봉래동이라고도 한다.
  봉래동 남동쪽에 위치한 봉래사는 1953년에 법화종의 사찰로 건축하였으나 그 후 천태종으로 개종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사그랭이.사문.상사문  옛날에 학문이 높은 선비 김희소가 경치가 좋은 산천을 찾아 다니며 글 읽기를 즐기던 바 이 동네에 있는 폭포에서 글을 읽고 폭포로 이루어진 모래밭에 글을 썼다고하여 동명을 소문이라 했다는 설이 있으며 또 다른 설에는 이 곳에 옛날부터 사기그릇을 굽는 옹기굴이 있어서 사그랭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소내.쇠내.소천.우천.하사문   부석면 소재지 마을이며 옛날에는 연천.소내.쇠내라고 불렀다. 봉황산 밑에 위치하여 봉황산과 연유한 봉황새는 풍류를 좋아한다고 우자를 소자로 변경시켜 소천리라 하였다고도 하며 또 일설에는 정옥 감사의 호가 우천이라서 우천이라 하다가 소천으로 개칭되었다고도 한다.
  진골.장곡   소천 2리에 속한 마을로서 마을 뒤편에 낮은 산줄기가 연이어져 있는 긴 골짜기로 형성된 마을이다. 옛날 안동 김씨의 늙은이가 이 골짜기에 이주하여 개척하였다. 그 뒤 인가가 골짜기에 길 게 들어서게 되어 장속이라 부르게 되었다가 지금은 우리말로 진골이라고 부르고 있다.
  탑두리.탑들.탑평  동리에서 북쪽으로 약 150m 지점에 탑이 있었다. 탑을 세운 연유는 지형이 사두형으로 생겨 당시 뱀이 많아서 사람의 왕래가 곤란하여 소통책으로 사두형의 목을 자르고 수로를 낸 후 사두 지점에 탑을 세우고 지명을 탑평이라 하였으니 그 후부터는 뱀이 없어졌다고 한다. 지금은 탑이 없어졌으나 탑이 섰던 자리는 남아 있다.
  새마을  소천3리에 속한 자연 부락으로서 소천 동네를 동서로 흐르는 사문천 냇가에 형성된 마을이나 1972년의 집중호우로 가옥 전답이 매몰 유실되어서 정부의 수해 복구 사업으로 새마을 주택을 집단으로 신축하여 새로운 부락이 형성되었다. 그 뒤 새마을 주택으로만 이루어진 마을이라 새마을이라 불려졌다.
  재궁터   소천6리에 속한 마을로서 탑평 마을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 마을이 처음 생길 때는 창원 황씨들이 산기슭을 개간하여 터를 잡고 살아왔으며 그 마을에 창원 황씨들이 제실을 지은 뒤부터 제궁터라 부르고 있다.

 

****용 암 리****     black07_up.gif[위로]
  화부.교천.화감  산의 형상이 화부지형으로 부근이 지면보다 높아서 흡사 꽃봉이리가 피어 있는 모양으로 보이며 그 꽃봉오리 안에 동네가 자리를 잡고 있으므로 화부동이라 한다. 한편 이는 풍수지리설에 의해서 명명된 것이라고도 한다. 이 동네는 연안 김씨의 세거지이며 옛날부터 만석거부로 양반이 행세하며 살아 오던 곳이다.
  망가매 만갑.망감  마을 앞산의 지형이 만갑장신지역과 같다고하여 만갑이라 하였다 한다. 옛날 도승이 이 동네를 지나가다가 앞산을 바라보며 절을 네 번 하고 지나갔다고 한다. 그래서 만갑 앞 들을 사배들이라고도 한다. 도승이 사배한 이유는 앞산의 지형이 만갑장신지형으로 산중에 장군이 태어날 묘터가 한자리 있다고 생각한 때문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이 전설은 동민들에게 잘 알려지고 있다.
  새두들.봉구  본 마을이 생기기 전에 매봉산의 형상이 매 모양으로 생겼으므로 새가 살지 못했다고 하며 동네가 생기고 사람들이 숲을 가꾸니 새들이 날아와서 살았다고하여 새두들이라 한다.
  새말.신촌   농토를 따라 한 집 두 집 모여서 살게되었고 새로 생긴 마을이란 뜻에서 새마을이라 칭하게 되었다.
  용바우.용암  마을 입구에 용머리 형상의 바위가 있어서 용바우라고 부르게 되었다. 마을 어귀에 있는 큰 바위에 운행우시 용와화암의 글자가 새겨져 있으며 이 글은 김규수의 글씨라 전한다.
  재궁물  용바위 동쪽에 있는 작은 마을이며 이 마을에는 재궁이 있다.

 

****우 곡 리****     black07_up.gif[위로]

우곡으로 내려가는 길목인 낙화암천의 아름다운 모습
 

 무덤실.매곡  옛날에 이 마을 뒷편에 옹기를 굽는 옹기굴이 있었으며 동민들이 옹기를 구워서 생계를 유지하였다고 한다. 한편 마을 주위에 매화나무가 많아서 매화나무로 울타리를 만들었다고 하여 일명 매곡이라고도 부르게 되었다.
  할미골.비기실.비곡  비기실 뒷골을 할미골이라 하는데 딸을 다섯이나 둔 할머니가 살다가 노화에 딸들의 집을 찾아 가서 살려 했으나 딸들의 구박이 심하여 다시 본가로 돌아오던 중 비기실 귓골에서 쓰러져 죽었다. 동네 사람들이 불쌍히 여겨서 죽은 노파를 묻어주고 이골을 할미골이라 불렀다. 그 할머니 무덤에는 지금도 해마다 할미꽃이 핀다고 한다.
  우수골.우곡.독지곡  옛날에는 독지곡이라 하였으며 마을 뒷편에 땀디에 특효가 있는 약수탕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다. 우수골 또는 우곡이란 동명은 자기 동리를 낮추며 타동을 높인다는 뜻에서 유래된 동명이라 한다.
  맴정.매암정  옛날에 매암 손흥경이라는 사람이 이 마을에 살았으며 이 사람이 늘 큰 바위 위에 앉아서 낚시를 즐겼으며 그 바위에 정자를 짓고 자기의 호를 따서 매암자이라 했다. 손흥경의 후손들이 지금도 보계리의 불바위라는 동네에 살고 있다. 

 

****임 곡 리****       black07_up.gif[위로]
  숲실.곰마.임곡   본래 순흥군 봉양면의 지역으로서 숲이 울창하였으므로 숲실 또는 임곡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임곡1리로 개편되었다.
  고마을.고촌  소백산맥을 등진 산촌으로 1914년 전 봉양면 당시 면소재지에 인접한 부락으로 면창고가 있어 고마을이라 불렀으며 지금은 농외 소득을 많이 올리고 있는 마을이다.
  한밤실.새골.소골.대율  밤나무가 많고 밤의 생산이 많아서 붙여진 일금이며 봉화 금씨가 살고 있었으나 지금은 수 가구만 남고 그 외는 청주 정씨등 각성이 우거하고 있다.
  쇳골.샘골  임곡2리에서 파생된 산촌이며 소백산맥을 뒤로하여 초원이 좋아 양축의 적지로서 가축의 방목으로 생계를 이은 몇 가구의 농가가 산재하고 있었으나 6.25동란 때 이주되었고 지금은 재입주하여 담배.과수 등을 재배하고 있다.
  덕거리  한밤실을 거쳐 마구령 입구 산록에 자리잡은 수 가구의 주막촌으로서 남대리.의풍방면으로 통하는 길목이라 옛 행인들이 내왕 중 여기서 후한 대접을 받았다고 붙어진 이름이다.
  당두들.당고  고촌 북방 1km지점의 소백 산맥 깊숙한 곳에 몇가구의 화전민들의 보금자리였으나 6.25동란 전 공비 소탕 작전 때 소개되었으며 현재는 폐동이 되고 자취조차 찾아볼 수 없다.
  웃숲실.상임곡  임곡1리 본동으로 옛날 봉양면 당시에는 면소재지였기에 편의상 상하부락으로 구분되어 불려졌을 뿐 행정 동리는 한 마을로 숲실이라 부른다.

  부석 오시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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